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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Itzhak Goldberg

 

옷이란 주제는 예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넉넉하든 밀착되었든, 옷이란 육체의 관능적 볼륨을 강조하거나 그것들을 보호 프레임의 뒤로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속성으로써는, 인간의 외형을 연출하는 다른 구성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자세, 머리형태, 제스츄어-  사회적 구분을 코드화하여 알려왔다. 그러나 겉포장이든 속성으로든, 의복이나 장식품들은 인간의 모습에 추가된 모범적 요소로 존재해 왔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몸을 벗어난 옷들이 예술작품을 위하여 하나의 진정한 주제로 사용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옷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의 오브제는 아니다.  이 제2의 피부는, 그 주인에게 분리되어서도, 불가피하게 그의 존재 아니 오히려 부재를 불러 일으킨다.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이러한 관계의 유희이며, 육체에 옷을 입고 안 입는 신체와의 근접성 에 따라, 이 옷에 환유 또는 은유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테마의 한국화가 유혜숙의 작품세계는 이토록 명확한 상징적 기능에서 벗어나 있다. 물론 그녀의 작품들은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어떤 예술적인 자유로움과 창작자의 능력 또한 확인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옷들이 관람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치는 것은, 작가가 그 옷들을 더 이상 일반적인 범주 내에 합류하는 주제로 여기지 않고 그 이외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나온 그 자신만의 특성을 가진 완전한 별개 요소로 대하는 데에서 온다.

 

윤곽 오려내기 라는 기술 용어가 이 독특한 성격을 잘 정의한다. 원래 사진작가들이 즐겨 사용해오던 윤곽 오려내기 작업인데 사진 속의 피사체를 배경으로 부터 분리하여 빈 바탕에 격리시키기 위해, 윤곽선을 따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모든 불필요한 요소로부터 놓여나, 작품은 존재감을 더 해가나 동시에 그 자신만의 고유의 공간을 만들어내며  근접할 수 없는 상징으로 변신한다.

 

이 흰 바탕에 떠있는 형체들은 기이하게도 모든 기능과 이동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더 이상은 어떤 것을  « 할것 »으로가 아니라 « 볼것 »으로써 전달되는 것이다.  주역이든  부속물든, 이것들은 이제 역할을 하는 조형물로 변신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것의 역할은 아주 자극적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 앞에서는 시선이 중립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물체들은 욕망, 털, 뜨거운 열기와 같은 관능미를 발산(아니 상징한다고 할까?)하며 육체 없는 모피는 에로틱한 환상들의  거의 자주적인 지원 같은 것을 스스로가 제공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가 남자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작가도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동물성에 관한 이야기기를 한다. 그리고 또한  유혜숙이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치밀한 처리방식이 이런 효과를 야기하는 것 같다.  매끈한 아크릴물감의 표면 위에 그려진 천들 위에는, 촉각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촘촘하고  서로 다른 크기의 수 없이 많은 연필터치가 주름과 주름을 형성해나가며 덮혀있다.  실체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암시하는 이것이 진정한 에로티즘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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