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Park Younjeong

 

생성(Becoming)

 

 

유혜숙 작가는 그리는 행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역사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며 그 결과물을 작업으로 내 놓는다. 이러한 그의 작업태도는 형태에서 이미지로 초점을 옮겨 창작의 과정과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프로세스 아트라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야말로 드로잉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hony Gormley)는 드로잉을 정신의 도표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에 비추어, 유혜숙의 드로잉이 단순히 평공간 위에 치밀하게 그려낸 그림이라기보다 사방 공간을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수많은 고리의 연결과 같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 또한 드로잉을 "상식이 만들어낸 언어가 아닌, 생각과 표현 방식이 자유한, 아니 적어도 자유하길 갈망하는 한 개체가 직관과 직감으로 또 다른 유일한 언어를 세상으로 끌어내어 육신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런 점에서 유혜숙의 드로잉 작업은 또 다른 방식의 몸의 사유이자 행위와 결합된 무의식적 기억의 집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작가의 치열한 작업태도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작업들로 구성되었다. 작가로서 가는 길에 등대가 되어 주었던 땅콩 드로잉, 작가의 노고가 느껴지는 작품을 배경으로 한 작업실 사진, 천이나 식물 같이 형태를 갖춘 이미지에서부터 습자지가 닳도록 선긋기를 하고 구멍 사이사이로 흑연가루가 배어난 3중 드로잉까지 다양한 화면의 긋기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는 특별할 것 없는 땅콩껍질 하나를 사람과 맞먹는 크기로 그리면서 화가로서 앞으로의 여정에 있어 중요한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수많은 재료 중에 연필을 택하고 하나의 관심 대상을 일 년 가까이 매일, 작게는 실물 크기로, 크게는 자신의 키만큼 집요하게 그려내면서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만나게 되었고 사물과 재료의 속성, 나아가 그들의 역사까지 자연스레 이해하는 여정을 지나왔다고 고백한다. 일상의 사물을 새로운 스케일로 바라보고 밀도 있게 재현하면서 작가는 그 사물의 사전적 의미와 다른 자신만의 오브제로 환생하는 것을 보았고 그 안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보았던 듯하다. 그로부터 그의 드로잉은 그 의식의 확장만큼 진화해왔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전개법과 4천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압도되는 것으로 유명한, 읽었다고 말하기 민망한 정도로 뒤적여보았던 그 책이 유혜숙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화두로 떠올랐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망각과 기억,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끊임없는 시간의 상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루스트는 소설 속에서 예컨대 과자의 맛이나 라일락 냄새 같은 자극에서 시작되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억의 고리를 엮어낸다. 한 인간의 의식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에서 모든 사건들은 내면세계 속 일인칭 화자의 시각을 통해 철저하게 걸러지며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마치 프루스트의 의식 전개 방식을 시각화 시킨 듯, 이번 전시에 출품된 유혜숙의 연필 드로잉에 집중하다보면 원초적 기억의 해방이 순식간에 펼쳐지듯 주변의 빛이 모조리 사라지고 끝 모를 블랙홀에 빠져드는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에게 기억은 결코 의도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의식의 과정이 아닌 것처럼, 유혜숙의 작업태도 또한 반복적인 그리기 행위를 통해 내면의 시선과 대상의 결정적 조우를 기다리는 순간으로 점철된다. 작정하고 어떤 대상을 그리기보다는 그리는 행위의 반복을 통해 조형을 찾아가고 생소함이 익숙함이 되기까지 외부 대상과 나 사이의 갭을 채워나간다.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일련의 연상 작용으로 인해 불현듯 과거의 기억을 일깨워주는 경우를 누구나 경험한다. 예컨대, 혀끝을 누르며 입 안에서 둥글게 말리는 민트 초콜릿의 쌉싸름함이 잃어버린 첫사랑의 향수를, 솥에서 익어가는 녹진녹진한 쌀밥의 내음이 컴컴한 시골 논둑길을 걷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의 쏟아질 듯했던 별들의 반짝임을, 향긋하게 퍼지는 아카시아 향기가 메케한 최루탄과 섞여 묘한 슬픔을 전해주던 대학 4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처럼, 그 추억의 시공간으로 빠져드는 순간 다가오는 행복과 슬픔의 교차는 예술적 영감으로 가는 길목에 다름 아니다. 작가는 그 교차로에 서서 음화와 양화 사이에서 어른거리는 기억과 오감(五感)의 편린들을 동물적 감각으로 받아들이며 화면을 채워나간다. 우리의 자아(自我)란 무의식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에 대해 미처 알기도 전에 시간 속에 매몰되어 해체되기 십상이다. 유혜숙이 삶의 체험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뚜렷한 줄거리나 극적인 상황이 없음에도 기억의 환생과 감각과 지각의 회상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사물과 자신과의 끈질긴 대화, 어떤 '현재'에 대한 그의 독백은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 앞에 홀연히 왔으며, 그로부터 우리와 그 암연 같은 '현재'와의 에필로그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