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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성원선

         (미술 평론)

 

  

                                                           “그녀의 빈방으로부터” 고독한 바라보기

 

작가 유혜숙의 전시 《그녀의 빈 방으로부터》에서 그림들은 검게 빛난다. 검은 그림들, 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한 암흑과 같은, 그리고 고독의 공간으로 불현듯 보는 자를 끌어들이는, 그 검은 그림들은 흑연으로 그려졌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흑연의 획들로 이뤄진 검은 그림들은 흑연 자체의 물질성으로 인해 회화이기보다는 검은색의 물질로 보인다. 또한, 관람자의 위치와 빛에 따라서 형상이나 얼룩 같은 것이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거나,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오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한다. 그것이 착시라 하더라도, 분명 어둡고, 검은 그림들은 시간에 따라서 그리고 보는 위치에 따라서 점점 형과 색을 만들어내며, 검은 공간에 빛이 들어오고, 벽을 만들고, 창틀, 문 같은 것들이 드러난다. 어떨 땐 검은 그림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 벽면 모퉁이로부터 저쪽 벽면 뒤로 사라진 듯한 환영이 보이기도 하고,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눈의 시각적 착시라고 자각하지만, 실재로 나의 눈은 멈추지 않고, 검은 그림 속에 떠오르는 환영과 빛의 그림자를 따라 흘러간다. 그리고 검은 공간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면, 마치 혼자 남을 것 같은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창조적 작업을 하는 경우, 우리들은 끊임없이 심적 이미지의 심층을 파고든다. 아주 이상한 일은, 미분화된 가장 심층적 수준 에서 가끔 창시적 이미지에, 특히 인간의 창작활동을 다루는 예술작품이 탄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시적 심상에 있어서 예술가는 자기 파괴의 우울한 면과 조광적인 면을 따로 구별하기 힘들만큼 동시적으로 경험하고 발산한다. 종종 우리는 회화작 품들을 통해서 대양(大陽)적/우주적인 행복감들이 준엄한 수난이나 죽음의 이미지와 같은 것들로 표현된 이상한 대조(對照)들을 볼 수 있다.

 

작가 유혜숙, 머리카락 작가로 알려진 그녀가 얇은 연필 선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예전의 작업들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머리카락, 털 뭉치, 스웨터와 천의 표피를 촉감적으로 그려내었다면, 점점 사실적인 묘사로 대상의 미시적인 질감에 몰입하면서 검은색은 캔버스 전체를 덮었고, 어둡고 강렬한 회화의 경향들은 짙어져 갔다. 그러나 작가는 점점 작품이 검은 그림으로 변화해 가자, 작품창작에 있어서 그리는 노동의 밀도가 점점 강해지게 되었다고 실토한다. 흔히, 노동집약형이라 부르는 작업인 극사실 회화는 대상의 보이는 사실 그대로를 그리기 위해서 다양한 기법들을 사용하게 되지만, 유혜숙 작가의 작업은 연필, 흑연이라는 단일재료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표면 질감의 느낌을 확대한 듯이 그려낸다. 상상해보자면, 흰색캔버스를 검은 흑연으로 가득 채우는 행위에 가까운 그녀의 작업 과정은 단조롭고 고단하여서 때로는 하염없는 시간의 무상함에 빠졌을 것이다.

 

그 후에도 더욱더 밀도 높은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그녀는 밤하늘의 별빛들, 강물의 검은 물빛들을 그려내면서 털옷, 머리카락과 같은 사실 묘사로 이뤄진 그림에서 강렬한 표현과 강한 물질성이 느껴지는 회화로 변화를 주었다. 표현과 재현, 상상과 실재의 미분화된 가장 심층적 수준에서 물, 하늘과 같은 무한한 공간과 스웨터, 털옷, 머리카락과 같은 인간의 몸과 가장 밀착된 것들 간의 기묘한 대조를 만들어낸다.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한 것들과 무한한 시공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를 하나의 재료, 하나의 기법을 통해서 만들어낸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공간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빛을 그려낸다고 하였다.

 

그녀의 근래 작업에서는 또렷한 사물이 사라지고, 무명(無名)의 공간이 그려지게 되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빛을 그린다고 말한다. 빛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닌, 시각 경험으로 빛을 볼 수 있도록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유혜숙은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고독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상에 몰입하게 되고, 그리고 고독한 몰입으로 완성된 그리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총체적 언설이 된다.

 

나는 작가 유혜숙의 검은 그림들을 보면서, 경계의 서성거림, 제한된 경험을 이탈하고, 미지를 찾아 떠나는 실재를 보고 있으나, 심상의 눈은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눈을 뜬 채로 눈앞에 놓여 있는 실재와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구분이 어려운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의 선험적인 기표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지만,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과정처럼 보이는 그녀의 작업들에서 보여지는 시각, 촉각과 같은 일차적인 감각보다, 흑연의 검은색을 통해 드러나는 창시적 이미지가 더 강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의 검은 그림에서 일어나는 착시는, 마치 손을 더듬어 검은 방에서 빛을 찾아나가는 것처럼, 그림을 보면 볼수록 시간이 지나면서 공간을 드러내고, 공간의 입체감, 실재감은 2차원의 캔버스의 평면을 입체로, 그리고 나를 둘러싼 공감각을 총체적으로 어느새 나는 검은 공간 안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고독감, 두려움, 공포, 희열, 희망, 안도와 같은 대조된 심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특히, 그녀의 작업들은 시각영역으로 사물재현을 넘어서, 외재에 대한 공통 적으로 지각되는 매개성을 ‘촉각 haphē’으로 특징짓고 있다. 오감을 통합해 지각의 ‘대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의미에서 그리스어 ‘공통감각 koinē aisthēsis’은 이러한 ‘촉각’을 통합감각의 매개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였 다. 이것이 공동체, 공동체에 속한 타자들과 같이 지각하고 판단한다는 의미인 ‘공통감각 sensus communis’으로 전이하는, 인류의 순수감각에 대한 논의들이었고, 이것들은 시각과 인지의 경계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오랜 시간을 거쳐 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검은 그림의 공간은 어느 곳일까? 그 공간들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의 부분 들에서 차용해온, 그림 속의 공간으로 그 곳에 있으나 잘 보이지 않았던 공간 들이다. 호퍼의 작품을 만나고 그 공간 속의 주인공들을 삭제하고, 그녀는 자 신이 보고자 하는 공간들만을 재구성하여서 그녀의 검은 공간을 그렸다. 주인 공은 사라졌고, 상상할 수 있는 실마리들은 없는 듯한, 차갑고, 고독한 ‘어둠’ 의 공간만이 남았다. 그 공간은 촉각적 공간이다. 검은 그림의 공간으로 관람자들을 들어앉힌다. 그곳에서 관객은 홀로 서있으며, 적막한 고요 속에 눈을 통해서 온 자아를 깨우는 감각의 근원인 빛을 따라간다. 마치 이것은 묘한 대조로서 텅 빈 공간에서 빛을 더듬고, 죽음의 본능과 같은 두려움을 느낄 만한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분화되어 자기 내면을 뚫고 자아의 유연한 진동 속으로 유연히 흡수되어가는 심상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들이 기술 복제되어, 파생실재(hyperréel)가 실재(réel) 를 압도하는 시대가 되었고, 오감만으로는 사실 판단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 했다. 이제 세상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받아들여지고, 이에 더하여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현상과 같은 ‘공통감각’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들은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현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리고자 하는 것들은 대상, 외재에 대한 묘사로 ‘시각’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미술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감각적 심상, 즉 눈의 시각성(Visuality)에 대한 미학을 담아내기 위한 예술가적 노력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각성을 통과한 작품은 시대, 문화, 지역, 인종 외에도 개인적인 조건들로부터, 하다못해 날씨와 기분에 따라서도 다르게 경험된다. 본다는 것은 자연적 현상이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단계에 이르면 망막에 잡힌 사물은 다른 생리적 감각 과정과 아울러 사회적, 문화적, 또는 심리적 장을 동시에 통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각성을 ‘문화적인 구성물을 만드는 언설의 총체’라고 명명하는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의 글을 차용하여, ‘보고자 하는 구성물을 언설하는 총체’ : 회화를 그리는(창작) : 보는(분석) 방식은 예술가 : 관람자에 따라 그리고 시대적, 문화적, 심리적인 장과 일상의 조건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감각의 형태로 실재되고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은 기술이 아닐뿐더러 진술도 아니다. 예술작품에서 보여지는 개별적 대상의 함의는 예술가로부터 그의 고유한 관심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자들의 해석은 예술의 언설의 총체를 읽어 내리고, 감각으로 환원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내 눈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 가능한 형태이다. 광선은 의미의 망에 잡힌다. 인간 존재는 스스로 시각적 경험을 집합적으로 조직화 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망막상의 경험을 사회가 승인하는 기술에 복종시킬 필요가 있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시각성, 즉 문화적인 구성물을 만드는 언설의 총체가 삽입된다. 그 언설의 총체는 시각성과 시각을 구별한다.”

-노먼 브라이슨(Norman Bryson)

 

그러므로 작가 유혜숙의 검은 그림의 언설들은 시각에만 머물지 않고, 시각성에 정착된다. 그것들은 그녀가 그리려 한 빛과 더불어 빛을 담아내는 공간에 대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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