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 HYE-SOOK
2020 정현
(미술 비평, 인하 대학교 교수)
빛을 위한 뒷면
“그 세상에서는 사물은 존재하기 위해 더 이상 그 반대가 필요하지 않으니, 빛은 더 이상 그림자가,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이(또는 그 반대인가?), 선은 더 이상 악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장 보르리야르, 『사라짐에 관하여』, 민음사, 2012. 21쪽
유혜숙은 작업을 위해 연필을 쥐었다. 무엇을 그리기보다 물리적으로 어떤 흔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자연스레 검정 그림을 그리는 동양 여성 작가라는 수식어가붙게 되었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업을 술라쥬(P. Soulage)와 비교하면서 서구남성적인 필체와 달리 필촉을 살려 연필로 점을 찍어가면 만들어낸 그의 미시적인 작업은 그 깊이를 파악할 수 없는 빛의 산란을 일으킨다고 해석하였다. 일필휘지 대형붓으로 그려진 술라주의 회화가 갖는 유성의 질감과 무게와 달리 유혜숙의 그림은 어둠 속 산파된 빛의 파편이 섞인 것처럼 새벽녘의 시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추상과 구상 사이의 경계에 놓인 그의 검정 그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상태로 나타난다. 때론 윤기 나는 검정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댕기머리로 나타났다가도, 어느새 화면 전체가 오로지 검정 선으로 채워진 추상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의 작업 방법과 질료는 단순하지만, 그에 비하여 상당히 다채로운 양태를 보여주는 것도 깊게 살펴볼 지점으로 보인다. 단순히 검정이라는 색을 바탕으로 한 작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관점이 아니라, 그가 구상과 추상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에 관한 연구가 이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기도 하다.
유혜숙은 2000년도부터 이미 파리 미술 현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동양인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검정 머리칼 회화가 주목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단순히 머리카락을 그린 것이 아닌 초상의 뒷면, 인간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작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물론 작가는 머리칼을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들은 선의 묶음일 뿐이며, 관람자들이 그것을 머리칼 혹은 인간의 뒷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정수리를 ‘백회’라 부르는데, 이곳은 모든 혈이 만나는 자리로 숨구멍이란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명상을 할 때 정수리로 숨을 쉰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같은 관점으로 유혜숙의 작업을 따라가다 보니 이 검정 회화가 단순히 특유의 질감과 오랜 수행으로 완성된 회화적 공간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문득 든다. 어쩌면 그는 검정이란 질료를 통하여 기체의 흐름, 빛과 어둠으로 형성되는 공간의 현상학을 가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이번 대구예술발전소에서의 개인전 <Towards an elsewhere>(2020)은 공간에 대한 감수성을 주제로 삼았다. 몇 해 전부터 진행하는 에드워드 호퍼(E. Hopper)의 그림을 참조한 작업은 검정이 아니라 어두움에 대한 작업이기도 하다. 여기서 어두움은 어떤 심리적 표현은 아니다. 다만, 호퍼의 그림이 갖는 고독이란 정서와 맞닿아 있기는 하다. 사실 호퍼의 회화는 미국적 인상주의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럽과는 달리 공업화된 도시의 정경과 외로운 이방인의 모습은 유난히 외로움을 자극함과 동시에 묘한 연민을 자극한다. 이처럼 호퍼의 회화적 서사성은 보는 이와 작품 사이의 정동(affect)을 강하게 일으킨다. 아마도 유혜숙은 호퍼 그림의 극적 장면이 어떤 사건이나 묫가 아닌 빛과 어둠의 관계라는 걸 알아차린 듯하다. 예를 들어, 호퍼의 “Morining Sun”(1952)이란 작품은 침대 위에서 속옷 차림으로 이른 아침 햇빛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저 일상의 한 장면일 뿐인데 외부에서 내부로 침투한 빛에 의해 만들어진 그림자가 화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우리는 언뜻 바깥을 바라보는 여인에 공감하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호퍼는 분명 그림자를 이용하여 알 수 없는 감정,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상태를 만들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유혜숙은 호퍼의 그림 속 그림자를 추출하여 새로운 공간을 화면 위에 새긴다. 공간은 처음부터 세워지지 않는다. 화면은 뿌연 안개처럼 채워진 후, 서로 다른 강도의 어두운 사각형이 자리 잡으면서 서서히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처럼 어두움의 차이가 검정 빛의 존재를 드러내게 한다. 서서히 여명이 밝혀지는 찰나의 시간이 포착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유혜숙의 회화는 흑백 사진의 표면을 연상시킨다. 수기모토(H. Sugimoto)의 사진이 한 피사체를 장노출로 포착하여 특유의 명암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연스럽게 작업 방식을 주목하게 된다. 사진이 빛과 어둠을 통하여 형상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혜숙은 흑연과 아크릴을 가지고 어둠을 그림으로써 빛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어두운 공간-말그대로 비어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보는 것인가? 그것은 부재가 아닐까? 실제로 작가는 단 한 번도 명쾌하게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제시한 적이 없었다. 단지 머리칼 또는 털을 연상시키는 질감을 선보였을 뿐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기괴한 존재를 떠올리기도 한다. 현재 작가가 집중하는 공간이란 세계와 머리칼, 털이란 대상은 서로 다른 주제로 보이지만, 이 둘은 존재를 감싸는 표피란 공통분모를 가진다. 머리칼과 털이 피부를 보호한다면 공간은 정신과 물질을 보전하기 위한 외피와 같다. 그러므로 유혜숙에게 검정은 하나의 색이자 물질이며 그림자이자 비어있음이다. 돌이켜보면 그는 단 한 번도 정면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정면성은 서구문명이 발명한 하나의 질서이자 상징으로 불변하는 진리와 다름없다. 그러나 일부러 정면 혹은 질서를 비껴가려 한다면, 이러한 태도는 어떤 이유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물론 유혜숙의 작업을 두고 어떤 정치성이나 사회적 관점을 추출하기는 쉽지 않다. 허나 그의 작업은 말없이 빛의 반대, 인물의 뒷모습을 주목한다.
미디어 네트워크의 발달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팽창은 세상을 전보다 다양화하고 확장시켰다고 자부하는 듯하다. 그러나 막상 우리가 처한 현실은 단형화된 삶의 모델을 밈처럼 증식하고 있다. 점점 더 익명의 존재는 사라지고 반대로 익숙한 또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존재의 유형만 복제되는 현실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른바 유토피아가 (가상적이라도) 실현됨으로써 현실은 그것을 초과한 상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견했다. 상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재현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도 예측했다. 유혜숙의 작업은 구상과 추상의 구분 없이 그 경계지에서 존재의 이면을 포착하고 있다. 그것이 점점 더 단형화 되어가는 현실을 지연하기 위한 노력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회적 표상이 될 수 없거나 되지 못한 이면의 모습에 천착하여 작업을 전개하는 그의 마음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궁극적 물음이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몸으로 올곧이 작업 전체를 가름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의 유일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