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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김하림

빛의 페르소나, 빛을 읽는 그림

 

어두운 공간에 잔잔하게 산란하는 검은 빛이 있다. 그 형상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온전한 페이크는 아니지만 주변의 조도와 보는 이의 시점에 따라 수많은 다른 얼굴을 가지고 다가온다. 한 점의 그림은 관객을 포함한 환경과 상호관계를 가지며 고독, 희망, 생명, 그리고 사그라짐 등 다채로운 페르소나를 표출하는 것이다. 암흑 속에서 한 가닥의 털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빛이 그 털 가닥에 닿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열려 있는 방의 모서리도 스스로의 발광하는 것이 아니고 이클립스(Eclipse)처럼 사물에 투영되어야 그 형상의 모양과 깊이를 인지할 수 있다. 그렇게 털에, 벽에 달라붙은 빛을 유혜숙 작가는 다양한 타협점을 가지고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다. 작품은 사물의 형태나 색을 보는 회화가 아닌 ‘빛을 읽는 그림’이다.

 

보통 흰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는 화가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하는데 태초의 무(無)는 백(白)이 아니고 흑(黑)일 것이다. 우주의 미아가 봄직한 미지의 검은 캔버스에서 작가는 창조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블랙홀 같은 공허한 공간에 사물을 읽게 해주는 빛을 초대할 때 그녀는 흡수와 투영의 중층적 특성을 가진 물질 흑연(graphite)을 사용한다. 상대성이 있는 물성의 흑연은 흰 종이 위를 달릴 때는 검은 선과 어둠을 만들어내지만 검은 면 위에 지나갈 때는 역으로 광원을 초대한다. 가장 단순할 것 같은 흑(黑)이 실은 변덕쟁이 보라색보다 더 다양한 운신의 폭이 있다.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가 빛을 99,96%흡수하는 VANTA-Black에 독점권을 쟁취했고, 이에 영국의 예술가 크리스티안 퍼는 “예술계에 있어 순수한 블랙은 다이너마이트에 비견되는 힘을 가진 존재”라 했다. 검은 전쟁을 발발할 만큼 매력적이고 무한대의 단층을 가진 블랙 위에 작가는 검은 빛을 입혀 더욱 신비스럽게 어둠 너머에 실체를 펼쳐주고 있다.

 

“가시적인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신비함이 있어요. 불어로 오들라(au-delà)라고 하면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너머를 뜻하지요.” -유혜숙

 

 

반복의 욕구, 중첩된 흔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동물인 카레닌(개)을 하루라는 시간을 동그라미를 그리는 순환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인간처럼 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달리기가 아니고 카레닌에게 인생은 둥글게 반복하는 원의 향연이자 일종의 회전하는 춤이다. 피아노 교본 중 하논(Hanon)이 반복적 트레이닝으로 실력을 키워나가듯 매일 화폭을 대면하는 작가도 훈련 같은 움직임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자는 카레닌이 떠올랐다. 댄서가 회전하는 춤을 출 때 그 동심원 중심의 회전축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이동한다. 그 회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니체가 언급하는 영원회귀이며 단순하지만 반복에서 얻는 궁극의 행복일 수 도 있겠다. 다시 말해 테레사(개 주인)의 사고(思考)에 투영된 쿤데란의 생각처럼 작가에게 ‘행복은 반복의 욕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반복해서 그리기는 지속적으로 대상을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하고 그 다음 대상을 찾고 있어서기도 하다는 작가는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관찰로, 그다음 되풀이 하는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하여 족적을 남기며 변화하고 있다. 일률적인 하루도 결코 어제와 같은 하루 일 수 없듯이 일상의 순환 속에서 소소한 규칙을 직조해내며 일정한 리듬 속에서 미세한 다름을 만끽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중첩의 흔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현(玄)의 여백을 밝혀주는 한줄기 빛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기를 계속 하다보면 무언가가 생겨납니다. 그렇게 그리는 시간이 지속되면 면을 만들고 공간을 나누는 것이지요.” -유혜숙

 

 

사물의 본질에 다다르기

 

이전의 작업 귀에서부터 머리카락, 털에 이르기까지 의제(擬製)는 다르지만 모두 살아있는 것 동물적인 생명성을 가리키고 있다. 부분이지만 극사실에 가까운 묘사는 섬뜩할 만큼 하이포며 그 안에는 유전자가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 있어서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자연의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그 탐조등은 살아 있기에 빽빽이 들어나는 표피에 근접해서 그 정체성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을 파괴하고 전혀 다른 생경한 물질로 이화시킨다. 이미지를 설명하는 작가가 아니길 바라는 지향점은 자명한 사실을 이중적 해석으로 유도한다고 볼 수 있겠다. 예로 원거리에서 나무가 빼곡한 산등성이 풍경으로 인식된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넘실대는 털가죽의 주름으로 변주하여 보는 이의 팔에 털을 곤두서게 만든다.

 예술가는 철학과 역사의 하인이 아니기에 시대의 이데올로기, 젠더의 이슈를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 작품을 다루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유혜숙 작가도 의무감에 묶여있지 않으며 고매한 미술관의 문턱을 넘거나 대중의 인기 몰이를 하는 것에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관심을 둔 그 무언가를 집중해서 읊조리다보면 처음 가졌던 의미와 동떨어진 새로운 의미로 인지되고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일련의 바라보기가 투영된 작품을 작가는 우리에게 소개하지만 동시대미술 어느 장르에 속하는지 정의내리지 않는다. 다만 ‘사물의 영혼’이 내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무념무상의 만 배(萬 拜)를 하는 고행자의 몸짓과 같이 타자성을 띈 반복적인 메서드를 통해 사물의 순수한 본체를 찾아 나갈 뿐이다. 오늘도 스스로 자가격리에 임하며 검은 像을 그리는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명명되어지지 않은 생생한 무엇’ 그 무엇의 본질에 다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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