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마엘 벨렉

(세르누치 미술관 학예사)

                                                          고요한 긴장


  현대미술의 해석은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역사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역사가는 결국 그의 분석의 주요도구들 중 하나 즉 ‘시대적 거리’를 결여한 채 현대미술을 접근해야 한다. ‘시대적 거리’라는 것은 파노라마적 관점을 갖고 어떤 생산물에서 특별한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작업과 사상의 흐름에서 공통적인 그 무언가를 추출하는 것이다. 유혜숙(1964년 생) 작품의 경우에도 그러한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비록 무언의 아주 역설적인 방식이긴 해도, 역사적 문맥보다는 작가의 손과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 탐험의 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거의 모든 것들이 보편적인 내면성의 담론, 혹은 전달을 거부하고 있으며 또한 이 작가는 자신의 충동 혹은 감정을 다의적인 기호의 형태를 사용하여 매우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암호화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가 접근하기에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 작가의 작업은 그러므로 역사가의 시야 보다는 인접 분야 사람들의 시야로 접근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예술가도 결국 완전하게 문화적, 사회적, 성적 혹은 세대적 결정체들로부터 벗어나는 만용을 부릴 수는 없다. 유혜숙은 필연적으로 이 작가가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의 예술가이다. 이 작가는 1987년 한국을 떠난 이유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떠남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동기의 일환이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작가는 결국 1980년대 망명의 유혹에 강하게 경도된 한국 예술가 세대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이 시기에 두 부류의 한국 예술가들의 입국 물결을 경험하게 된다. 그 한 물결은 1980년과 1983년 사이에 광주 사태의 잔향 속에 입국한 예술가들이고, 또 다른 물결은 한국을 떠나는 것이 더욱 용이했던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들어온 예술가들이다. 이 두개의 연대기적인 사건 사이에, 유혜숙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프랑스로 입국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프랑스가 문화와 조형예술에서 일종의 준거가 되는 국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프랑스에 대한 선호는 미국과 그렇게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 나라로서는 다소 의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 나라의 지적, 예술적 환경 속에 특히 문학과 영화 덕분에 프랑스 문화가 보급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쉽게 설명된다. 그에 더하여 화가들에게는 프랑스가 20세기 전반기 서구의 가장 중요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탄생한 나라라는 매력과 명성이 뒤따른다.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아카데믹한 규범으로 교육받은 예술가들에게는 일종의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유혜숙의 출국 이면의 여러 사적인 동기들을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프랑스 입국, 서울의 이화여대, 파리 8대학과 파리 보자르의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의 수학은 그 무엇보다도 그녀로서는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기위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의 예술지평은 프랑스 문맥 보다는 미국미술사에 더 많이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 두 나라의 주요 서구적 운동은 유혜숙 작품의 모태일 수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숭고한 추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하이퍼리얼리즘으로 전개된다.


  1990년대 초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채색된 평면들의 중첩과 병치를 이루는데, 이는 그 구성과 색조 양자의 측면에서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들을 환기시킨다. 하지만 이들 작업들은 이 한국작가에게 있어서 오래 지속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평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절제된 작업이 자아내는 단순한 평면과 구성에 대해 그녀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91년 시작된 일상생활 요소들의  재현에 관한 시리즈들은 지속적인 발전의 사슬에서 첫 번째 고리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 예술가의 여정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유혜숙은 드로잉과 회화, 구상과 추상 사이의 중간지대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그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상생활의 요소들을 기술한다. 예를 들면 하얀 바탕 위에 고립되어 놓인 해부학적 자양물 혹은 덩어리들이 그것들이다.  이 주제는 이 작가로 하여금 동시에 여러 다른 스타일 예를 들면, 세부적 드로잉으로부터 어떤 실루엣을 환기시키는 단순한 얼룩에 이르기까지 실험해 보게 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재현들이 실제 대상물의 동일화 과정을 풍성하게 하는 내용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게 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연속적인 작품들은 묘사된 대상의 전개 혹은 레이아웃의 변화에 기반을 둔 여러 원초적 나레이티브 도식들을 설정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대상읽기'(Lire les objets)라는 제목의 시리즈 속에서 추구되고 있다. 이 제목은 드로잉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놓인 환경 탐구에 대한 이 작가의 의지 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 탐구되고 이식되는 것에 대해 단순한 형식적 유희를 넘어서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역량을 명백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본질적으로 땅콩 혹은 붉은 강낭콩의 재현에 관한 이전에 시도된 그리고 이후에도 중심이 되었던 탐구의 추구로 이루어진다. 이를 위한 주된 방안은 기념비적 포맷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상에 대한 대중의 ‘읽기’를 활성화하고, 작가로 하여금 어떤 설득력 있는 방식에서 단계의 변화를 수행하도록  대상들의 분석과 해체의 섬세한 과정을 필요로 하게하고 있다. 이러한 단계의 변화는 이전에 시도된 여러 조형적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관찰된 주제의 질감과 사건의 세부를 재현하거나 이들 대상을 다소 미묘한 점과 면에 의해 형성된 단순한 실루엣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땅콩 형태는 유혜숙 작업 특유의 진화 메커니즘에 따라 2000년에 '머리결'로 돌연변이를 하게 된다. 이러한 변모는 이 작가의 작업이 이론적이고 미학적인 단절을 보여주기 보다는 형식적 지속성과 테크닉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머리칼 웅큼은 검정 아크릴릭으로 채색될 수 있지만, 이 작가의 머리결은 흑연을 사용한 인내력이 수반된 드로잉작업이다. 이 작업에서는 일부 땅콩작품에서처럼 그의 양감과 질감이 회복되고 있다. 이 머리결 소재는 마치 그 머리결의 임자로부터 분리된 것처럼 흰 배경 위에 외따로 떨어졌기 때문에 특히 충격적인데, 다른 양상으로도 표현된다. 즉 뒷모습의 여성 두상의 인상적인 재현에서부터 클로즈업 되어 보여지는 머리 가르마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범위로 표현된다. 작가로 하여금 핵심적인 원초적 인식을 부여하는 이 작업 시리즈는 심리학, 문화연구 그리고 성 연구에서 많은 해석을 야기하여 왔다. 머릿결의 소재는 그러므로 종종 한국적 여성성의 분명한 암시로 이해되어진다. 특히나 묘사된 헤어스타일 유형을 보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이 작가는 머리칼과 체모 사이의 등가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주제로부터 떠오르는 동물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이 작가를 고무시켜서, 2005년부터 지속적으로 머리결의 소재를 이따금씩 털의 재현을 위한 것으로 다루게 한다. 여러 작업에서 이러한 주제의 다양한 변화는 이전에 보여주었던 변화만큼 프레임의  다양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떤 작업들은 털이나 의류 조각들이 하얀 배경 위에 외따로 떨어져서 머리털로 존재하게 되는 반면에, 또다른 어떤 작업들은 추상적으로 표현한 머리결의 방식으로 동물의 털에 의해 완전히 덮혀진 화면을 보여주게 된다. 2011년부터 유혜숙은 이 이미 검증된 프로세스에 이러한 주제로 충만한 필드를 확장하고자 한다. 2013년까지 지속된 일련의 시리즈는 풍경의 차원을 캔버스에 도입한다. 상단부는 파랗게 칠해져, 하늘로 보이게 하고 그 밑부분에 털의 주름에 의해 형상화된 산악이 전개된다. 2015년에는 거의 10년간 이용되어 왔던 일종의 도상학을 갱신하기 위해서  이러한 탐구의 마지막 아바타가 등장하는데, 이는 가죽천으로 테이블 위의 기하학적 물체를 덮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점차적으로 퇴색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아카데믹하게 묘사된 주름 연출로 관객의 관심집중이 빛의 처리로 향하게 되므로서 결국 그 의미가 공허해지게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혜숙은 이 주제를 포기하게 된다. 브레타뇨 지방의 케르게넥(Kerguéhennec) 에서의 레지던시 기간 동안인 2016년에 제작된 물의 도면(plan d'eau) 시리즈 작품들은 이러한 과도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물표면의 클로즈업된 모습의 재현은 여러 잔물결의 반향으로 비춰지게 되는데,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작업으로 계속된다. 이로서 이전의 작업흐름들은 점점 축소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이 작가로 하여금 선에 의한 드로잉의 세밀함을 버리게 하고, 빛의 파열을 재현하기 위해 평면을 더 선호하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탄생시킨 2015년의 강한 수평선으로 점철된 작품들의 엄격함과 결합한다. 검은 배경은 그대로이지만, 테이블은 침대가 된다. 침대의 시트는 케르게넥 레지던시에서 실험된 과정에 따라 처리되었다. 이와 같은 보다 큰 영역에서 빛의 처리는 에드워드 호퍼(1882-1967)의 회화적 전거들, 즉 창문을 마주하는 침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지만 유혜숙은 작품에서 인격성을 배제하고, 멜랑콜리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이들 작품들은 낯설은 불안함의 감정 전달자이게 된다. 이 낮선 불안의 감정은 오랫동안 인테리어 시리즈에서 지속된다. 이 시리즈는 점차적으로 모든 대상이 제거되어서 결국 반그림자의 흔적에 의해 형성된 고요한 공간으로 귀결되며, 이는 오늘날까지 주된 주제가 되어 왔다.


  이와 같이 선의 상대적 진화는 1990년대의 '자양물' 재현으로부터 오늘날 이 작가의 주된 작업인 비어있는 건축물로 이어지는데, 이는 한 시리즈로부터 또 다른 시리즈로의 형식과 표현의 전환 메커니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단계는 일련의 시각적, 기술적 혹은 의미론적 등가성에 의해 이전의 단계와 연결되는 것이며, 또 다른 단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타임라인에서 단지 두 개의 작업유형만이 예외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에샤르드(Échardes) 시리즈로서 2003년에서 2010년 사이에 제작된 일련의 드로잉과 릴리프이며, 또 다른 하나는 2009년에서 2014년 사이에 진행되었던 '별자리'(Constellations) 시리즈이다. 머리결을 주제로 한 설치실험과 간헐적인 사진작업의 시도는 별개로 하고 상기한 작업들의 주제와 기술적인 면에서의 독창성은 이들 작업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일관성이 유지된 작업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기발함은 유혜숙 작품의 어떤 국면들을 비춰주고 있는데, 그것은 통상적으로 어떤 테크닉의 연속체에 그러한 기발함의 깃듦에 의해 부분적으로 모호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상 머리칼과 털에서 이 작가에 의해 느껴지는 동물성, 야만성은 길고 섬세한 테크닉의 채택에 의해 통제되는 반면에 에샤르드(Échardes) 시리즈는 공공연한 공격성을 표출하고 있다. 릴리프에서처럼 드로잉에서도, 핑크색의 띠들은 다수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그의 외적 표면 위에 곤두서있다. 이들 드로잉에 불규칙적인 윤곽들과 이들 띠들의 뒤엉킴은 내부의 가시로 연결되는데, 이는 의자라는 사실을 잊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은 초현실주의적이며, 내적 감정의 외적 폭력으로부터 그리고 상징화된 표현으로부터 자아낼 수 모든 것 내에서 그러한 주제의 선택은 예상하지 못했던 불안정성을 중심으로 유혜숙 작업의 통합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 작가의 주제와 테크닉을 통해, 이 작가의 작업은 특히 드로잉을 개인적 표현의 탁월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여성작가들 그중에서도 많은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업과 근접시킬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유혜숙의 전반적인 작업은 작가의 의도, 즉 구체적 대상 혹은 공간으로부터 관객을 명시적인 비인칭적 처리로 마주 대하려는 작가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기 성찰적이 되고 있다.


  별자리(Les Constellations) 시리즈는 이러한 공격성을 또 다른 방식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테크닉에 의거하고 있다. 바닥에 깔린 검은 종이 위에, 유혜숙은 육체적으로 자신의 팔다리가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격렬하게 연필을 휘두르는데, 종이 위에 그려지는 점과 선은 그녀의 몸을 지지하게 된다. 이따금 흑연으로 구멍을 내면서 이 작가가 재료의 물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방식, 그리고 이 작가가 자신의 몸짓 흔적들을 새겨나가는 방식은 분명 한국에서 단색화 열기 이래로 한국미술현장의 작가들에 의해 두루두루 공유되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의 보이는 야만성(brutalité)은 유혜숙 작가에게 고유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야만성이 정신적 필연성에 반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야만성은 어떤 조형적 역할을 상정하게 하는 듯 싶다. 그리고 이 야만성은 이 작가로 하여금 2000년대 초기 이래 보여주었던 주제와 섬세한 장인정신을 결국 포기하게 하였다. 그러한 장인정신은 '물의 도면'(des plans d'eau) 시리즈 흐름 이전에 그리고 선에 의한 드로잉연습을 포기하기 이전에는 거의 중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십여 년간 어떤 주제에서 보여주는 동물적 속성과 같이 공격적 형태의  표현방법은 유혜숙의 작품 전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며, 거기에는  난폭한 충동의 맥락과 느리고 제한적인 작업 방식으로 그 충동들을 길들이고 테크닉으로 통제하는 그 사이에서의  긴장감이 규칙적으로 보여진다  최근의 진화된 작업들은 이러한 해석을 보다 공고히 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2016년과 2018년 사이에 작업된 '내부'(les intérieurs) 시리즈는 위압적인 존재감을 유지하는 틀-바깥(hors-champs)의 구성으로 특정 지워진다. 여기에서 문입구 혹은 외길복도는 아무것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어둠 속으로 진행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거의 2년 동안, 클로즈업의 사용은 관객의 시야를 어떤 빛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이 빛은 천천히 흐릿한 빛 속으로 표류하게 한다. 광원의 모호함은 이전의 공간 작업에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안정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안정감을 그가 최근에 발견했다는 더 큰 고요함으로 연결해 나가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혜숙은, 개인적 일화에 동의 않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함과, 하이퍼리얼리즘과 숭고한 추상, 회화와 드로잉이 서로 혼합되어 자신만의 어휘를 창조하게 한 긴 여정의 끝에 평정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가가 자기만의 규율을 갖는 창작성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작업을 특징짓는, 일종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차분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